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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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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8. 09:30 일상스토리/마음의산책

전쟁의 기억에서 잊혀진 아이들
 

 

 

 조지 F. 드레이크 박사(85)는
 나이 21살, 1952년
 정보부 사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어느 날, 부대주변에서 두 살짜리 남동생을 업고
 헤매던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나게 됐습니다.
아이는 오늘 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드레이크 박사는 어린 자매를 데려다가 씻기고 먹였다.
굶주림과 피부병까지 상태가 너무 안 좋았던 아이는
 일주일 만에 건강해져 도움을 준
 그를 보고 활짝 웃어 보였다고 했다.
당시가 회상됐는지 드레이크 박사의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다.

 

 "아이의 웃음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은 나뿐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의 미군들이 함께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드레이크 박사는
 고아원을 위한 통신서기로 자원했다.
그는 미국 각지에 지원물품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고
 물품이 도착할 때 마다 감사편지를 보냈다.
처음 6개월 동안 그가 쓴 편지는 1,000여 통에 달했다.

마음이 맞는 미군병사들이 힘을 합쳐 고아원을 설립하고,
도시를 돌며 고아들을 찾아내고 트럭에 태워
 고아원에 데려다 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 각지에서 구해낸 아이들이
 무려 54,000여 명이나 됐다.

드레이크 박사는 최근 50여 년 전 자신이 데리고 있던
 한 소년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지금 부자도 아니고 명예도 없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참 가치관과 내면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그때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드레이크 박사는 이런 편지를 받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때를 잊지 않고,
또 몰랐던 사연을 알게 하기 위해
 사진전, 집필활동 등 많은 홍보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금전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찾고 싶은 건 명예도 돈도 아닌,
자신과 어려운 시절을 공유하고 함께 버텼던
'우정'이 아닐까 싶다.


# 오늘의 명언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 존 웨슬리 -

 

출처 : 따뜻한 하루

 

 

 

posted by 건우 아빠
2015. 9. 16. 07:30 일상스토리/마음의산책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나라 중에 '에티오피아'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 대부분 사람은 '가난'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그렇다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난'이 아닌 '감사함'이란 단어를 먼저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그것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제네바 국제연맹에 가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약하고 득 될 것이 없는 나라를 
선뜻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작은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드디어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 후 유엔이 설립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에서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


라는 '집단안보'를 주장하고 나섭니다.

유엔은 셀라시에 황제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집단안보'는 세계 평화를 향한 진보적 한 걸음을 떼게 한 
위대한 결과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 후, 첫 번째로 발발한 전쟁이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6.25'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셀라시에 황제는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유엔에 한국을 도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왕실 근위대였던 '강뉴 부대'를 
파병하기로 하였습니다.

강뉴란 말은 에티오피아어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2. 초전박살

 

한마디로 한국전쟁에서 두 가지의 뜻을 실천하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강뉴 부대'를 파병할 당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강뉴 부대는 16개국 참전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5차에 걸쳐 6,037명의 참전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어떤 참전용사들은 월급을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마운 강뉴 부대원들은 6.25가 끝나고 모국으로 돌아가자
7년 동안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됩니다.
목축업을 하던 나라에 풀이 없어지자 가축들은 굶어 죽었고,
아프리카 최강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100만 명이 굶어 죽기도 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봉기했고,
1974년 '맹기스투'라는 군인이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셀라시에 황제는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고 발표했지만
측근에 의하면 독살형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강뉴 부대원들 또한 공산주의와 싸운 대가로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어떤 분들은 6.25 참전 사실을 숨긴 채 
이름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공산정권에서 민주정부로 바뀐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참전 용사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6.25 당시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였을 때,
그분들은 대한민국이 지구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왔고, 가장 용감히 싸웠습니다.

 

==========================

 

지금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모르고
그저 가난한 아프리카의 나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일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희생한 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자유는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

 

출처 : 따뜻한 하루

 

 

 

posted by 건우 아빠